[북한] 평안남도 숙천군 약전리 협동농장 추수를 마치고
글. 대북사업팀 김동언 주임
2005년 1월 못자리용 비닐박막 1,000만M2를 지원해 달라는 북쪽의 팩스가 왔다. 이것이 단초가 되어 북한에 복토직파농법을 소개하게 되었고 수차례의 토론회를 거친 끝에 2005년 7월 북으로부터 복토직파농법 도입하겠다는 공식적 입장을 듣게 되었다. 그리고 12월 8일 개성에서 최종토론을 거쳐 복토직파 시범사업에 합의하고 올해 2월, 시범사업 대상지인 평안남도 숙천군 약전리 협동농장(관리위원장 박명순)을 답사하였다.
약전리 농장은 김일성훈장을 두 번이나 수상한 경험이 있는 우수농장이었다. 우리는 30만평의 땅에 보리를 먼저 파종하기로 하고 남한의 직파전문농이 방북하여 남한에서 가져간 찰쌀보리 종자를 북한 농민들과 함께 파종하였다. 한달 남짓 지나서 보리가 올라오기 시작하였는데 생육이 양호해서 북한의 농민들이 매우 만족하였다. 당초 보리농사의 결과를 보고 벼농사를 결정하려고 했는데 협동농장 농민들과 협의를 통해 벼농사 일부도 복토직파법으로 짓기로 하였다. 이에 협동농장 관리위원장, 농장원들이 한자리에 모여 한사람도 빠짐없이 의견을 제시한 끝에 최종적으로 800정보(240만평)로 의견을 모았다. 협동농장 전체 쌀 경작면적 2400정보의 1/3, 여의도의 3배에 이르는 면적이었다.
처음엔 복토직파기 24대를 지원하는 선에서 논의가 되다가 회의를 거듭할수록 트랙터, 비료, 농약 등 농사에 필요한 거의 모든 자재들을 지원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사실 북한의 인구대비 경작면적이 크게 부족한 게 아님에도 매년 식량부족현상이 일어나는 원인 중 하나는 시비, 병충해 방제 등 생육관리에 필요한 비료나 농약 등의 부족 때문이다.
이렇게 결정된 농업협력사업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고 한 달에 2번씩 방북해야 하는 바쁜 일정이 시작되었다. 파종, 종자소독, 농기계 사용 등 복토직파에 관련된 모든 영농기술에 대해 개발자인 박광호 교수를 비롯한 남한의 농업전문가들이 현장지도를 하고 농민들과의 토론회를 계속했다. 그리고 4월과 5월, 파종기를 맞았을 때는 그야말로 ‘전투’가 시작되었다. 복토직파는 남한의 농민 한 사람이 하루 평균 1만5천 평 정도를 파종한다. 그런데 북한에서는 3교대로 24시간 쉼 없이 해서 하루 6만 평 이상을 파종했다. 전기도 없는 들에서 횃불을 들고 작업한 농민들의 열정과 부지런함에 우리는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거기다 북한 농업과학원 리선준 박사는 4월부터 지금까지 약전리 협동농장에 살다시피 하며 농민들과 얼마나 열심히 다녔는지 그의 청색운동화는 낡을 대로 낡아 있었고 얼굴은 햇볕에 그을려 정말 완벽한 구리빛이었다. 그리고 박봉주 내각총리, 리경식 농업상도 현지 지도를 내려와 농민들을 격려했다고 하니 북한이 남북 농업협력 역사상 최대 규모인 이번 농사에 얼마나 큰 관심을 보이는지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정작 문제는 남한에서 발생했다. 보급된 지 얼마 되지 않은 ‘복토직파법’으로 남북농업협력을 하겠다고 하자 과거 실패했던 직파법으로 오해한 사람들이 사업규모가 너무 큰 데다 실패한 직파법으로 남북관계에까지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친다며 반대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수많은 난관 속에서도 7개월 동안 정성으로 보살핀 약전리 벌판은 올 가을 황금물결을 이루었다. 9월 27일 복토직파 추수행사에 함께 간 남한 농업전문가들은 정보당 9~10t의 벼가 수확될 것으로 예상하고 근처 우수한 농장과 비교해도 10~12% 더 나올 수 있을 것으로 내다봤다. 30년 만에 찾아온 저기온 현상 때문에 서리를 막기 위해 애간장을 태우며 밤새 횃불을 들고 지키고, 쏟아지는 폭우에 물을 빼느라 허리가 휘어지도록 고생한 농장 농민들 덕분이었다. 박명순 약전농장 관리위원장은 좋은 성과를 얻기 위해 최선을 다하다 보니 허리띠가 두 칸이나 줄어들었다고 했다.
그래서 올 가을 첫추수 행사는 그야말로 잔치였다. 남북한 농민들이 함께 어우러져 벼를 베고 황금빛 벌판에 자리 깔고 앉아 햅쌀로 지은 밥을 먹노라니 남북이 하나가 된 듯했다. 햇밥을 올린 떡판에 남북이 번갈아 가며 떡메를 치고 팥고물에 이리저리 묻혀 서로 먹여주는 모습이 한가위가 따로 없었다. 우리가 약전리 농민들의 공을 격려하며 박수를 보내자, 북의 농민들은 손사래를 치며 남한의 지원 덕분이라며 공을 우리에게 돌렸다. 남과 북의 民과 民이 풍년의 기쁨을 나누며 서로 부대끼는 가운데 작은 화해가 일고 있었다.
약전리 협동농장에서의 감격이 채 가시기도 전에 10월 9일 북한의 핵실험 보도를 접하게 되었다. 그 충격에 며칠 동안 멍한 상태로 있었다. “그래도 지원을 계속 할 것인가?” 거듭되는 질문을 받으며 재단사업의 목적을 생각했다. 그러나 답은 간명했다. 전쟁이 나도 적십자사는 아군이든 적군이든 치료하고 돌보듯이 우리도 생명 자체가 소중하기 때문에 북한의 어린이들, 환자들, 농민들을 계속 돌보는 것이다.
어떤 분들은 햇볕정책의 퍼주기식 지원이 핵으로 돌아왔다며 인도적 지원 중단을 주장한다. 하지만 민간단체들의 인도적 지원은 생명을 이어가게 하는 최소한의 생명줄이다. 우리의 지원에 너무 고마워하던 순박한 북한 주민들의 생과 사가 어쩌면 우리의 마음먹기에 달린 것이다.
피를 나눈 가족도, 죽고 못 살듯 결혼한 부부도 서로를 이해하지 못해 의절을 하고 이혼을 한다. 북한과 우리는 60년이 넘는 세월을 다른 세계에서 살아 왔다. 달라도 너무 다른 그들을 이해하고 품으려는 마음이 화해의 첫 시작이다.